이정구 (15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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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정구(1564년)는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세손으로,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정응태의 모함 사건에서 변무주를 지어 조선의 입장을 변호하고, 광해군 시기에는 후금과의 관계에서 명나라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조반정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다. 저서로는 《월사집》 등이 있으며, 검소한 삶을 살았고, 부인 안동 권씨와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전기 학자이자 바둑의 대가인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세손으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 속에서도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손꼽힌다.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검소한 삶을 살았다.
2. 생애
가계와 출생, 임진왜란 시기 활동, 광해군 시기 활동과 대명 외교, 인조반정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각각 하위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2. 1. 가계와 출생
조선 전기 학자이자 바둑의 대가인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세손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 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해하면서 군자(君子)가 태어나 문명(文明)을 밝힐 상징이라고 여겼다.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 대제학이라는 문형의 길을 닦았다. 이정구의 후손들은 조선 말기까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버지 | 이계(李啓) |
---|---|
어머니 | 현감(縣監) 광주(光州) 김표(金彪)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 예조판서 권극지의 딸 |
장남 | 이명한 |
며느리 | 정부인 반남 박씨 - 박동량의 딸 |
장손 | 이일상 |
자부 | 전주 이씨 - 이성구의 딸 |
손자 | 이가상(李嘉相) |
자부 | 안정 나씨 - 나만갑의 딸 |
손자 | 이만상(李萬相) |
손자 | 이단상(李端相) |
손녀 | 서문상(徐文尙)의 처 |
차남 | 이소한(李昭漢) |
장녀 | 홍영의 처 |
외손자 | 홍주원 |
외손자부 | 정명공주 -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
차녀 | 사인(士人) 정현원(鄭玄源)의 처 |
2. 2. 임진왜란 시기 활동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개성으로 피난 가기 전날, 광해군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인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갑자기 사망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황신 등과 함께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하여 파란이 일었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이항복이 정사, 이정구는 부사, 한석봉이 서기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정구는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어전통사가 되어 대명 외교에 있어 적임자가 되었으며, 선조 32년(1599년) 윤9월 26일에 광해군 세자 책봉 주청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2. 3. 광해군 시기 활동과 대명 외교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병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우빈객, 지춘추관사 등을 겸했다.광해군 즉위 후에도 외교정책에 참여했으나, 광해군 5년 김제남 옥사에 연루되고, 광해 9년 11월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논의할 때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창할 때 끝까지 정청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대북 세력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정귀를 비롯한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광해 10년(윤4월 15일) 명나라 도사(都司)가 사은사가 오지 않는 이유를 정응태 사건과 같이 왜적과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광해 10년(윤 4월 23일)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조선군이 심하 전투에서 패배하고 강홍립이 포로가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과 명분론에 입각한 징병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광해 10년 11월 10일, 천추사 이흥주 등은 서광계와 장지발이 올린 주본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고분고분하게 회답하고 폐백을 주고받으며, 누르하치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표현했다. 또한 이러한 정황 때문에 누르하치가 요동을 공격하여 명나라 내지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광계는 조선이 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의 군사력을 활용해야 하며,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서 감독하고 관계를 공고히 하여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사적으로는 조선을 강하게 만들어 전투와 수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지발은 조선에서 1만 명을 징발해 직접 훈련시켜야 하며, 누르하치가 조선을 위협하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므로 조선 군신들이 두려워하며 몰래 동맹을 맺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비변사는 이러한 인식이 서광계나 장지발뿐 아니라 구경(九卿) 회의에서도 나온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1만 명 이상의 원병을 보낸 상황이었는데, 이를 다시 반복해야 했고, 명나라의 감호 파견은 조선과 명나라 관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분 | 평안도 | 전라도 | 충청도 | 황해도 | 총계 |
---|---|---|---|---|---|
포수 | 1,000명 | 1,000명 | 1,000명 | 500명 | 3,500명 |
사수 | 1,500명 | 500명 | 500명 | 1,000명 | 3,500명 |
살수 | 1,000명 | 1,000명 | 500명 | 500명 | 3,000명 |
총계 | 3,500명 | 2,500명 | 2,000명 | 2,000명 | 10,000명 |
이때 이정귀는 폐모론에 대한 처벌을 기다리며 도성문 밖에 있었으나, 다시 복귀하여 진주사로 파견되었다. 이정귀는 비밀 차자에서, 명나라 대신들이 서광계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어 정면 대응보다 완곡한 표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군사 작전에서도 직접 참여보다 국경에 군사를 배치하여 명나라와 함께 양면에서 대치하는 것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군량 문제에 대해서는 호남, 호서의 군량미를 팔고, 하사받은 은 1만 냥으로 의주에서 쌀을 구매하면 3~4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운송 문제도 해결된다고 하였다. 이 계획을 통해 무역 허가를 얻어내면 명나라가 누르하치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정귀는 명나라를 방문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황제의 졸기와 칙서를 받아왔으며, 서광계 등의 의심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2. 4. 인조반정 이후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셨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셨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등 꼿꼿한 절개를 지켰다.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삶은 검소하고 질박했다고 전해진다.3. 대명 외교 활동의 상세
이정구는 뛰어난 문장력과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대명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조 26년(1593년)에는 제술 문관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정구는 어전통사(御前通事)로 활동하며 대명 외교에 필요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그는 명나라와 관련된 문제나 외교 문서 작성에 참여하여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정응태 사건과 광해군 시기 명나라의 압박 등 주요 외교 현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 1. 정응태 사건 해결
이정귀는 선조 31년(1598년) 정응태 사건 당시 정응태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변무주(辨誣奏)를 작성하였다. 그는 정응태가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조선이 왜와 결탁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신숙주 때부터 이어져 온 조선과 일본의 외교 방식을 설명하고, 조선이 정말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했다면 7년간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이후 이정귀는 이항복과 함께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에 대한 불신 여론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는 명나라 내부에서 조성된 오해를 해소하고 조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3. 2. 광해군 시기 외교 위기 극복
광해군 시기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이정구는 이러한 외교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나라의 서광계 등은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이정구는 진주사로 파견되어 명나라 대신들을 설득하고,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여 추가적인 군사 지원과 경제적 지원을 얻어냈다. 특히 군량미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명나라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호남, 호서의 군량미를 팔고, 하사받은 은 1만 냥을 의주로 보내 중강에서 쌀을 구매하면 운송 걱정 없이 3~4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무역 허가를 얻기 위해 이 계획을 제안하면 명나라가 후금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이정구의 노력 덕분에 명나라의 의심을 해소하고 외교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4. 문학적 업적 및 평가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손꼽힌다. 한문학에 능통했으며, 특히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어, 외교 현장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4. 1. 바둑 관련 일화
이정구는 바둑을 즐겨 두었으며, 바둑과 관련된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시에는 귤중락(橘中樂)과 같이 바둑과 관련된 고사가 인용되어 그의 바둑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어느 날, 이정구는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어떤 중이 시를 받으러 왔다가 대국이 끝나지 않아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 이정구는 밤늦게 바둑을 마치고 중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 주었다.
사방이 툭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귤 속의 진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신선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인간세상에서는 도끼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
- 坦腹(탄복): 배를 드러냈다는 뜻으로, 중국 명필 왕희지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툭 트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귤중락(橘中樂): 신선들이 귤 속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유괴록'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5. 부인 권씨와의 일화
부인 안동 권씨는 평생 베옷만 입고 산 검소하고 현숙한 여인이었다. 정명공주(선조 임금의 딸)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공주의 집을 빛내기 위해 모든 재상 부인들을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재상집 부녀자들은 부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옷차림에 값비싼 패물을 착용하고 잔치에 참석했다. 그런데 가장 늦게 도착한 한 늙은 부인이 허술한 가마에서 내렸는데, 무명 베저고리에 무명치마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농촌 여인의 모습이었다.
여러 부녀자들은 그 노부인을 보고 "저런 촌 늙은이가 어찌하여 이런 자리에 오나."하며 의아해하며 업신여겼다.
하지만 그 늙은 부인이 뜰에 올라오자 정명공주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부축하여 극진히 맞이하고는 제일 상석에 앉히고 공손하게 대접했다.
잔칫상이 들어온 후 그 늙은 부인이 먼저 일어나 작별을 고하자, 공주는 "해가 아직 멀었으니 더 노시다 가시지요."하며 만류했다.
이에 부인이 대답했다. "저희 집 대감은 '약원도제조'로 새벽에 입궐하셨고, 큰아들은 이조판서로 정원에 나가 있고, 둘째 아들은 승지로 임직하여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것인즉, 늙은 제가 돌아가서 저녁 식사를 차려 보내야 하므로 부득이 일찍 돌아가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재상집 부녀자들은 그제야 그 늙은 부인이 월사의 부인임을 알고, 자신들의 화려한 차림을 부끄럽게 여겼다.
6. 가계
아버지 이계(李啓)와 어머니 현감(縣監) 광주(光州) 김표(金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예조판서 권극지의 딸이다.
아버지 | 이계(李啓) |
---|---|
어머니 | 현감(縣監) 광주(光州) 김표(金彪)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 - 예조판서 권극지의 딸 |
장남 | 이명한 |
며느리 | 정부인 반남 박씨 - 박동량의 딸 |
장손 | 이일상 |
자부 | 전주 이씨 - 이성구의 딸 |
손자 | 이가상(李嘉相) |
자부 | 안정 나씨 - 나만갑의 딸 |
손자 | 이만상(李萬相) |
손자 | 이단상(李端相) |
손녀 | 서문상(徐文尙)의 처 |
차남 | 이소한(李昭漢) |
장녀 | 홍영의 처 |
외손자 | 홍주원 |
외손자부 | 정명공주 -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
차녀 | 사인(士人) 정현원(鄭玄源)의 처 |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 말기까지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다.
7. 저서
- 《월사집》
- 《서연강의》
- 《대학강의》
8. 이정구를 연기한 배우
임혁주는 왕의 여자에서 이정구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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